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낭 포슈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제1차 세계 대전]] 때 활약한 프랑스의 군사 사상가이자 장군이다. [[조프르]], [[페탱]]이 전쟁 초/중반에 프랑스-영국 연합국을 패배의 위험에서 구해낸 '방어의 영웅'이었다면, 이쪽은 연합국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준 '결전의 주인공'이었다. 근본은 19세기 인물로 인생의 49년을 19세기에 보내고 남은 29년을 20세기에 보낸 만큼 인생의 거의 5/8는 19세기에 국한되어 있다. 19세기의 포슈는 지휘관보다는 군사 사상가로 유명했으며 특히 그의 공세주의와 정신력을 기반한 군사 이론은 한국에서 [[엘랑 비탈]] 교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. 이때의 일로 인해 아르당 뒤 피크(Ardant Du Picq)와 함께 19세기 프랑스의 대표 군사 사상가로 평가받는다.[* 포슈의 군사이론은 [[리델 하트]]에 의해 통렬하게 비판받았으나, 이 비판의 타당성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. 더불어 흔히 하는 오해와 달리, 포슈의 군사이론이 의지만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. 자세한건 [[엘랑 비탈]] 문서 참고.] 그러나 논란이 있는 군사이론가로서의 행적과 별개로, 1914~1918년의 1차 세계대전에서 [[명장]]으로 맹활약한다. 특별한 군 지휘 경험이 없던 제20[[군단장]]부터 활약했으며, 제9군 사령관으로서 1차 [[마른 전투]]에서 맹활약한 공로를 기반으로 명성이 치솟았다. 이후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하면서 1차 이프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승승장구하지만 1915년의 연이은 공세들의 실패로 인해 [[솜 전투]] 이후 실각했다. 그러나 1917년에 프랑스 참모총장으로 복귀하고 [[에리히 루덴도르프]](Erich Ludendorff)의 춘계 공세로 인해 연합군이 위기에 빠지자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서 분열되어 있는 연합군을 뛰어난 외교 능력과 넓은 전략적 안목으로 결합해 [[독일 제국]]을 좌절시키고 [[백일 전투]]로 상징되는 연합군의 대반격을 개시해서 대대적인 승리를 이끌었다. 그 외 특이점이라면 연합군 총사령관(Généralissime of the Allied Armies), [[프랑스군]] 원수(Maréchal de France), [[영국군]] 명예원수(British Field Marshal)[* 유일하게 프랑스군 원수와 영국군 원수를 겸임한 인물이다. 그리고 유일하게 [[런던]]에 [[동상(조형물)|동상]]이 배치되어 있는 [[프랑스인]]이기도하다.], [[폴란드군]] 명예원수(Marszałek Polski)등 '''삼국 원수'''에 도달하고, 후술하겠지만 1차 대전을 종결한 공을 바탕으로 수많은 메달, 상, 명예 학위 등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. 가장 별을 많이 단 군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, 폴란드군과 [[영국군]] 원수는 계급장에 별을 사용하지 않기에 실제 달았던 별은 프랑스군 원수의 별 7개뿐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